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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섬이다 ]

제주는 '기억'의 섬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억


나는 원도심 한짓골(일도일동)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때까지 살다 떠난 후 30년 만에 생가로 돌아와 8년째 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국이 마을 재생이라는 사회적 이슈로 들썩이고 있다. 나는 원도심 한복판인 한짓골에서 원도심 마을 재생의 현장을 마주하고 있다.

원도심은 크고 작은 근현대사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물들이 현존해 제주 문화와 역사의 시대적 흐름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도심 박물관이다. 그곳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직은 견디고 남아있으나 하나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박 씨 초가(삼도이동). 3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가옥으로 제주 특유의 안거리와 밖거리,
우영팟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도 7대째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 

웃한짓골(한짓골은 중앙성당을 기준으로 남문로터리까지를 웃한짓골, 칠성로 입구까지를 알한짓골로 나뉜다.)에 위치한 박 씨 초가는 제주 초가의 전형이다. 제주 초가는 살림의 규모가 커지면서 별동 양식으로 여러 채가 한 가구를 구성한다. 박 씨 초가 역시 별동으로 지어진 안거리와 밖거리가 있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육지의 가옥들이 안채와 사랑채로 남녀 성별로 공간을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안거리와 밖거리로 부모와 자식의 세대 간 공간 구분이라는 특징이 있다.

내가 특히 제주 초가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안거리와 밖거리의 배치 양식과 그 구성원의 관계이다. 안거리와 밖거리는 크기로 차별화하지 않는다. 또한, 제사나 마을 일에 참여하는 등 그 집 살림의 중심이 되는 세대가 안거리에 거주한다. 즉, 안거리에는 부모가 살고 밖거리에는 자식이 살다가 자식이 성장하여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을 때 안거리와 밖거리의 구성원이 바뀌어 자연스럽게 부모 세대는 자식 세대에게 안거리를 내어준다. 자연스러운 공동체의 세대교체를 엿볼 수 있는 생활방식이며 제주 사람들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올레(삼도이동)

제주 초가와 함께 공간 구성의 특징 중 하나가 올레다.
제주의 올레는 거리길이라는 공공의 공간에서 개인의 집안으로 진입하는 사적인 공간을 연결하는 전이 공간이다. 올레의 구부러진 형태는 제주 바람의 세기를 줄이는 자연 환경적 이유와 외부의 액운을 막는다는 신앙적 해석은 물론 살림집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 기능 등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올레들도 지금은 소방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라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문화는 제주 주거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원도심의 주택에서는 일본의 편리성과 제주 전통방식이 혼합된 건축물이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주택이 고 씨 주택이다.
또한, 일본식 주상복합 2층 건물도 나타났다. 그 예가 지금의 순아커피 건물이다.

고 씨 주택은 우리의 온돌 난방과 일본 방식의 복도, 벽장, 실내 화장실 그리고 제주 전통방식의 안거리와 밖거리 배치를 잘 보여준다. 이 주택은 탐라문화광장 조성사업 시 철거될 위기에서 시민사회단체와 지역 언론의 노력으로 보전되어, 지금은 도시재생센터에서 ‘제주사랑방’으로 운영 중이다.

순아커피 건물은 적산가옥(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적산가옥(敵産家屋)은 패망한 일인 소유 재산 중 주택을 지칭한다.)으로 숙림상회라는 잡화점이었다. 숙림상회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의 집으로 우리집과 가까워 초등학교 시절에 놀러도 많이 다녔고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도 심심치 않게 다녔던 곳이다.
숙림상회는 당시 1층의 절반은 잡화점, 나머지 절반은 부모님이 기거하시던 방으로 사용했고, 가파른 내부 계단을 통한 2층은 자녀들이 사용하는 주거 공간이었다. 몇 년 전 태풍으로 외벽이 손상되어 신축을 고려했으나 지역 건축가인 탐라지예건축사사무소 권정우 소장의 설득으로 철거되지 않고 지금은 원도심의 옛 정취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커피숍으로 되살아났다.


공동벽체 빌딩(일도일동).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각각 지어진 공동벽체 건물로 건물주가 4명이다.

1960, 70년대의 원도심은 상업의 중심지로서 3, 4층 높이의 건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준공된 원도심의 건물들은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가 없는 4층 이하로 최상층은 주택, 나머지 층은 상업과 업무시설로 구성된 건물들이 많다. 이는 주거 공간과 상업 공간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건물들은 공동벽체로 지어져 외부에서 보면 마치 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개의 계단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계단실마다 건물주가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유럽의 구도시에 가면 볼 수 있는 블록화된 공동벽체의 건물들과 유사하다.

1980년대까지 제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은 도시 팽창에 따른 관공서의 이전과 공동주택의 등장으로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의 구분이 뚜렷해지면서 급격한 인구 감소로 도심 공동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특색있는 작은 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발맞춰 원도심에만 존재하는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시도를 기대해 보고 있다.


 제주목 관아(삼도이동). 제주목 관아의 야경. 담장에 설치된 현수막들이 경관을 해치고 있다.

요즘 지역주민들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개방성 확보, 무료 개방, 야간 개장 등 시민공원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복잡한 법적 절차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요구라 생각하며 뜻있는 시민들의 동참을 기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져 가겠지만 남아있는 것들의 보존과 활용방안에 대한 지방정부의 노력,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사진: 고봉수


고봉수

5대째 사는 원도심 토박이로 이.엠.피 파트너즈 대표이다. 관덕정 주변 원도심 지역 주민협의체 대표이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