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 NEXT
[ 생각을 수눌다 ]

공동체 문화 실천의 장으로서 문화도시 제주 실현 


지역과 집단 또는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가 다양화하면서 독자성 유지 차원에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려는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민족이나 지역문화(정신문화, 물질문화)를 통해 정체성을 추출하고 정립하기도 하며, 공동체 문화에서 공동체 정신을 도출하기도 한다.
제주도 공동체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ᄌᆞ냥 정신(절약 정신)과 수눌음 정신이 거론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 정신이라 할 때 그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항상 존재하지만, 추상적인 대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 ᄌᆞ냥 정신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다. 적어도 농경시대 제주도는 가난하고 평화로운 섬이었고,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먹고살기 위하여 집 안과 밖의 노동에 부부가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성인지 감수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성역할을 구분하면서까지 생활하기 어려운 가난한 환경이었다. 즉 제주도는 원시시대부터 평화 공동체였고, 그러한 정신이 현대까지 이어져서 2005년에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선포되었고 평화와 번영의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1세기인 이 시점에 문화도시 제주의 지향점으로 ‘수눌음 정신’을 선택한 것은 ᄌᆞ 정신을 바탕에 두고 제주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을 구현해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반면 공동체의 신념이나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와서 제주 사회는 내국인의 이주가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지역 공동체 구성원 간에 갈등이 나타났다. 그동안 제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주지 않더라도 지속되고, 고유성이 전승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제주도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양해지면서 제주도의 고유한 문화를 찾아내어 재정립하는 한편 보존하고 전승해야 할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우리들의 공동체 문화가 방치되더라도 유지되고 살아남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거나 방치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무관심과 방치 수준에 가까웠음을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외부의 충격이 없을 때는 변화의 정도를 감지하지 못하는데 충격의 강도가 점점 높아진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마치 제주 공동체 정신이 소멸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제주 사회 곳곳에서 지역과 지역문화를 소생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말하자면 공동체 정신은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는데, 요즘에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수눌음 정신을 부각시키려는 행동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문화도시에 대한 열망이 있다. 이에 제주도 인문 자산의 가치를 인정하고, 공동체 정신을 회복함은 물론 다양한 구성원들과 공존할 수 있는 문화환경 만들기에 수눌음 정신을 적용해 보려는 것이다.
‘수눌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사람은 사회적 동물임을 실감케 하고, 이웃과 문화 공유가 가능해야 함을 알게 해 준다. 제주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수눌음 정신은 전통문화에 잘 녹아있다. 예를 들면 일생의례와 세시풍속을 통해 제주 사람들은 평화와 공존을 최우선에 두고 서로 협력하여 문화공동체 유지에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생의례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 단계부터 출생과 혼인, 죽음과 사후 제사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러야 하는 절차를 말한다. 이러한 의례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이웃과 친척들의 협력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특히 서로 간 협력체계의 주요소는 시간과 정성이다. 지금은 그 자리를 화폐가 차지하고 있으나 제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정신을 가치 있게 드러내기 위하여 수눌음 정신에 방점을 찍고 싶어 한다.

제주도 공동체 문화는 가족, 문중, 마을 단위로 형성되어 있으며, 집단에 따라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 간혹 공동체 문화의 부정적 측면에서 집단문화 또는 집단이기주의로 비치기도 한다. 이는 공동체마다 내재하는 요소이므로, 부정적인 요인이 발생하게 된 사회문화적 환경을 이해하려는 열린 시각이 필요하다.
현재 제주도에는 내국인과 외국인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고 있어서 국가와 민족은 물론 지역 간 문화 다양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동안 제주 사람 중심으로 유지되었던 공동체에서 인구 유입에 따른 문화의 혼종이 발생하고 있다. 반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내부인과 외부인 간 경계 만들기에만 급급해한다면 수눌음 정신이 훼손될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수눌음 정신은 국적, 인종, 종교, 성 등을 포용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 정신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제는 좀 더 개방적인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객관화하여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고, 각자가 보유한 문화적인 요소들을 인정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문화도시 제주가 추구해야 할 ‘수눌음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공존해야 하는 대상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것이 공동체 문화이며, 이를 지탱해 주는 것이 공동체 정신이 된다. 그래서 정체성과 공동체 정신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공동체 정신은 개별 정체성 정립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제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수눌음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왔고, 제주도는 그 정신을 자양분 삼아 발전해 왔다고 포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반성도 필요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고유한 공동체 정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정신이 실천될 수 있도록 사회 곳곳에 전파되고 있음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과 개발에 치중한 정책들이 추진되어 왔으며, 물질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현실에서 국민들의 문화적 감수성 회복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문화기본법’을 제정(2013년)하여 개인의 문화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지역공동체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계승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지역문화진흥법’을 제정(2014년)하여 지역의 문화적 가치 확산을 권장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지역공동체 정신의 토양을 발굴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을 제정(2016년)하여 국가와 지역의 고유성 유지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시각을 반영하여 제주도에서도 관련 조례를 제정하여 제주 사람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공동체 문화 회복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제주도 곳곳에서 문화가 핵심 가치로 떠올랐고,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 주거환경, 경제, 정치 등 사회 전반에 문화가 스며들 수 있는 문화 활동이 활성화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들이 문화적인 감수성을 지닐 수 있도록 수눌음이라는 공동체 정신이 문화도시 제주가 추구하려는 신념으로 선택되었다.
제주 사회에서 회자되는 ‘문화예술의 섬’은 2014년 민선 6기부터 정책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제주 사람들이 문화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 만들기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제주시에서는 2016년부터 시민들이 문화적인 기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문화도시를 만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수눌음 정신은 제주도의 환경에 반응한 자생적인 공동체 정신이라 한다면 현대적 의미의 수눌음 정신은 노동시간과 자본을 공유하는 것에서 문화다양성이라는 문화공동체의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제주도 전체를 문화도시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의식이 문화적으로 변해야 하고, 의식이 바뀔 수 있도록 문화의 생활화가 가능해야 한다. 이와 같은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사회구성원 모두의 능동적 참여가 담보되어야 한다.지역과 마을 단위의 공동체 정신이 제 색깔을 지킬 수 있으려면 제주의 독자성과 보편성이 공존해야 하고, 제주의 전통문화와 외부에서 이식해 온 문화가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지역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문화도시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결국 제주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수눌음 정신이 미래에도 살아남게 하려면 장소와 가치관에도 다양성과 포용성이 덧씌워져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한다면 수눌음 정신에 기초하여 아시아 주변국과 문화 공유가 가능하도록 문화 공적개발원조(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사업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ODA 사업은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의 17번째 목표로 선택되었으며, 핵심 목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의 실천 장소를 제주도에만 국한하지 말고 국내는 물론 아시아 지역까지 확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진: 문순덕

문순덕

제주연구원 연구위원이며 문학박사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언어학(한국어, 제주방언), 여성문화, 문화정책, 제주학 등이다. 현재 제주문화와 제주방언 연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