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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을 수눌다 ]

수눌음의 대물림


겨울철 감귤 따는 풍경

# 어머니의 수눌음

‘수눌음’이란 말을 생애 처음 접한 기억은 십대 시절이다. 어느 초겨울 날 아침, 어머니는 노동복 차림으로 집을 나서면서 “수눌러 간다”고 했다. 1970년대 중반이었으니 내 고향에는 감귤 농사가 자리 잡은 때였고 수확기였다. 그러니 우리 과수원이 아닌 누군가의 과수원으로 감귤 수확하러 간다는 뜻이었다. 수눌러 간다는 말은 생소했다. 그 어감이 외국어 같고 왠지 아스라한 정감이 느껴져서 좋은 의미인가보다 짐작은 했다. 그 뜻을 묻는 나의 질문에 어머니는 이 집 저 집이 “수눌어 가멍” 일을 하기로 했다고만 대답했다. 제주말보다 표준어에 좀 더 익숙해 있던 10대 아이는 이 말을 상부상조, 품앗이를 뜻하는 제주말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어머니는 평생을 제주의 작은 마을에서 보냈으므로 수눌음이 익숙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철이 들 만한 시기여서 그랬는지 내 기억에 남은 것은 감귤 수확기의 수눌음뿐이다.

사실 어머니가 수눌어서 일할 때는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일도 하고 남의 집 일도 한다는 계산에서였다. 남의 집 일을 하지 말고 쉬는 날도 있었으면 했다. 수눌어야 일이 빨리 끝나고 쉬는 날이 생긴다는 계산을 하지 못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그 집 가서 일해 주었는데 막상 그 집 사람이 나중에 안 오면 어쩔 거냐고. 어머니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그럴 일은 없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말에 한 치의 의심도 안 느껴져서 오히려 이상했다. 사람이라면 그래서도 안 되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는 단호함. 그 단호함은 염치에 대한 믿음이었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 염치가 있고 없음은 당장 드러나게 마련이다. 염치가 체면치레로 종종 치부되는 요즘과 달리 염치는 사람다움의 동의어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염치에 대한 믿음은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잣대였다. 남의 집 일이라도 대충 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하는 것도 다 이 염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믿음이 없었다면 수눌음도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수눌음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또 한 가지는 당당한 어머니의 태도다. 그 당당함은 평등에서 나온 것이다. 수눌음은 누구의 희생이나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다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여러 손길이 필요한 일이 수시로 생긴다. 이럴 때 필요한 일을 해주고, 또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누구를 위한 일이라는 식의 동정이라는 감정이 끼어들지 않는다. 너는 요만큼 했지만 나는 이만큼 더 해준다는 식의 선심도 요구되지 않는다. 동정이나 선심이 끼어들면 받는 쪽과 주는 쪽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또한 받는 만큼 한다는 계산법과는 다르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이 고정돼 있어서 주는 쪽이 일을 부리고 대가를 치르는 경우에는 냉정한 계산법이다. 반면에 주고받는 쪽이 수시로 바뀌는, 관계 역전을 경험하는 것이 수눌음이다. 이런 경우에는 상당히 느슨한 계산법으로 엮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남의 집 일을 하고 있지만 금방 우리 집 일을 해줄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이다. 주고받는 쪽이 수시로 바뀌는 경험은 각자의 삶의 처지와 상관없이 제 할 일 한다는 자존감과 당당함을 준다. 기실 평등이야말로 각자가 제 일 하면서 산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 어머니의 수눌음을 되새겨보면 우리가 수눌음을 귀한 유산으로 소환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수눌음이라는 형태 속에 박혀있는 염치와 평등의식의 회복은 어느 시대에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 나의 수눌음

어린 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역사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그리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후로 수눌음이라는 말을 접한 것은 주로 신문지상이나 제주 관련 논문 등에서였다. 활자로 만난 그 말은 마치 신화나 전설 속에 남아있는 삶의 흔적만큼이나 거리감이 느껴졌다. 수눌어 가멍 사는 일이 현실에서는 그만큼 멀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고보니 감귤 농사를 계속 짓던 어머니의 입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수눌음이란 말은 점차 사라지고 “일꾼 구하기가 어렵다”, “인건비 감당이 안 된다”는 한숨이 감귤 수확철마다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눌음은 사라져버린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가 바로 그 수눌음의 현장에 있었다. 20여 년 전 막 문을 연 한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회원들의 회비에 의존하는 단체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문화 활동을 펼치는 자생적인 시민단체다. 그런데 말만 시민단체가 아닌, 정말 시민단체다. 공부를 하건, 행사를 치르건 회원들이 직접 움직인다는 뜻에서다.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니고 한다고 해서 뭐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뭔가를 주고, 뭔가를 한다.


한번은 단체에서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그 방면에 나름 전문적인 회원이 지휘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모여든 회원들이 포스터를 들고 시내 곳곳에 붙이러 다녔다. 나이 지긋한 회원도 있었고 나름 명망 있는 회원도 있었다. 그들이 뚤뚤 말린 포스터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밤길로 나서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명 그 자체였다. 그러고는 일이 끝나자 고생했다고 서로가 밤참을 산다고 어깨를 밀치는 모습이 이어진다. 일도 하고 돈도 내고 그러고도 행복해한다. 내가 좋아서 가입한 단체에서 하는 행사에 힘을 보탤 수 있으니 좋은 것이다.
   

누군가는 시간을 내고, 누군가는 자기가 연마한 재능을 나눈다. 누군가는 행사에 참여하여 열기를 더하고, 또 누군가는 행사장의 의자를 치운다. 그리고 누군가는 얼마간의 회비를 거르지 않고 낸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행사를 치르고 단체 살림을 이어간다. 그 대가가 돈이라면, 물론 없다. 왜냐고 물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고 한다. 고마워서라고 한다. 해보니 좋아서라고 한다. 서로서로 고맙다고, 덕분이라고 한다. 그러니 흥이 더해지는 모양이다. 

2018 문화도시 제주 사업 성과 공유회에서 회원들 모습, 사진제공 : 제주문화포럼

그렇게 이 단체는 올해로 24년째를 보내고 있다.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선심 쓰는 후원자도 없는 민간시민단체가 이렇게 긴 수명을 누리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머니의 수눌음을 뒤늦게 떠올리면서 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단체는 어머니의 수눌음과 흡사하다. 염치와 평등이 살아있어서 그렇다. 이것이 이 단체의 힘이고 지속성의 이유가 아닌가 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어머니 시대의 수눌음은 생존방식이고 조건이었다. 지금 이 시대의 수눌음은 생존의 필수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일까? 첫째는 자기 성장과 성취에 있다. 각자가 동기나 필요는 다르게 시작했을지 몰라도 어느새 부쩍 커지고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장과 성취는 돈 주고도,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염치와 평등을 마주하면서 얻는 것과는 그 성격이 판이할 것이다. 그리고 더 크게는 이 사회에 대한 염원에 있다. 이 단체의 설립 이념은 ‘문화로 세상 바꾸기’다. 우리가 하는 작은 문화적 행위가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한 작은 씨앗이라고 느낀다. 거창하고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회원들은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이곳에서 이뤄지는 행위만큼은 좋은 세상을 지향하고 그쪽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시대가 어쩌네, 사람들이 변했네 해도 누구나 수눌엉 살아야 하고 수눌엉 살 수 있다. 이 단체가 그 증거이다. 이 단체와 같은 것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그 단체들끼리도 수눌엉 사는 곳을 상상해본다. 곳곳에서 수눌엉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를 꿈꾼다. 그래서 수눌음이라는 단어가 일상의 용어로 다시 자리 잡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권영옥  |  도서출판 장천 대표

제주 서귀포에서 나고 자랐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방송구성작가로 오래 일했다. 지금은 작은 1인 출판사 대표 직함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