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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을 수눌다 ]

수눌음 문화의 의미, 다시 생각하자


# 제주 공동체 의식의 근간, 수눌음

수눌음은 제주문화 혹은 제주 정신의 특수성을 거론할 때 ᄌᆞ냥(절약) 정신과 더불어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ᄌᆞ냥’이 식량이나 물건을 아껴 비축하는 개체적 행위 규범인 데 비해 ‘수눌음’은 이웃 간에 노동을 교환하며 힘든 일을 서로 거드는 관계적 행위 규범이다. 그래서 수눌음은 제주의 미풍양속이고, 공동체 의식의 근간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한반도에도 두레, 품앗이 등 공동노동이나 노동 교환 방식의 습속이 전승되어왔다. 두레는 촌락공동체 단위의 집단적 공동노동으로서 마을 구성원에게 부여되는 의무였다는 점에서 강제성을 띤 협업노동이다. 이는 자발성을 지닌 수눌음과는 그 내용과 성격이 다르다.
 

한편 품앗이는 개인적 친분으로 맺어진 마을 내 소집단 간 공동노동이고 ‘품’을 지고 갚는 노동 교환이다. 현상적으로 품앗이와 수눌음은 다르지 않다. 특히 교환되는 노동력의 강도를 타산적으로 산정하지 않는 점은 품앗이와 수눌음에 공통된다. 
‘품’은 ‘어떤 일을 하는 데 드는 힘이나 수고’라는 말인데, 합리적으로 본다면 품을 교환하는 것은 힘 혹은 수고가 대등해야 한다. 그런데도 실제로 교환되는 노동력의 강도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남녀노소의 노동력을 대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 관념에 평등의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서열적 인간관이 지배하는 문화였던 한반도의 경우,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노동력의 가치를 엄밀하게 타산하지 않는 것은 친밀한 이웃이라는 정의적(情誼的) 관계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정서적으로 친밀한 이웃 간의 상부상조 의식이 만들어낸 비타산적 노동 교환이라는 점에서 품앗이와 수눌음은 상당히 유사하다.

# 품앗이로만 해석할 수 없는 특이성

그런데도 수눌음을 제주문화의 특수성으로 거론하는 데 이견이 없는 것은 수눌음 문화의 성격과 그 저변에 흐르는 정신에서 품앗이와 동일시할 수 없는 차별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주 전통사회에서 수눌음의 양식은 단순히 노동력 교환에 머물지 않고, 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행해졌다. 밭을 밟거나 김매기 등의 농사일뿐 아니라 집을 짓고 지붕 이엉을 잇는 생활상의 문제나 마을의 힘든 일에서도 수눌음을 했다.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계[접], 예컨대 상여계, 그릇계, 천막계, 산담접, 방아접, 그물접, 잠수계, 목장계 등 역시 수눌음의 형태이다. 물질생활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계가 거의 사라져 버린 지금에도, 목장계나 잠수계 등의 생산공동체에는 수눌음으로 공동작업을 하는 관행이 남아 있다. 이렇듯 제주 사회의 수눌음 양식은 노동력을 수누는 것 외에도 물질적 문제 해결을 위해 상부상조하는 다양한 양태를 보여왔다. 이 점에서 수눌음은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제주 사회에서 제주인들의 생활문화의 한 축이고 합리적인 생존방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수눌음 행위의 성격에도 제주도만의 특성이 있다. 한반도에서 행해지던 품앗이는 노동력 교환 방식이긴 하나, ‘품앗이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품을 지고 갚는 관계가 꼭 대등하지는 않다. 물질적으로 좀 더 어려운 사람이 좀 더 넉넉한 집의 일을 해 주고 그 보상으로 다른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에 비해 제주도의 수눌음은 대등한 처지에서 반드시 동일한 것을 주고받는 행위, 즉 ‘서로 베푸는’ 행위였다.

제주 마을, 구좌읍 종달리 전경

# 수눌음에 깃든 제주 정신과 제주 문화

수눌음에 관한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품앗이의 제주 방언”, “제주지방에서 농사일이 바쁠 때 이웃끼리 서로 도와 일하는 풍속”, “제주도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의 품앗이”로 해설된다. 제주시 향토문화백과에서는 “제주도에서 전승되는 제주 특유의 노동 관행”이라 정의하면서 육지의 품앗이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존의 이 정의들은 공통적으로 수눌음을 품앗이의 외연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는 적절치 않다. 제주문화가 한국문화의 하위범주로만 해석될 수 없는 특이성이 있듯이, 수눌음 역시 품앗이의 하위범주로 해석될 수 없는 특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특이성은 앞에서 언급한 수눌음의 다양한 양식이나 수눌음 행위의 성격에 그치지 않는다. 수눌음 문화가 제주 사회문화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개념인 한, 거기에는 제주도라는 시공간에서 형성된 특유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를 일컬어 제주 정신 혹은 제주 문화라 할 것이다.


수눌음에 작동하는 제주 정신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서로 베푸는 행위에는 받은 만큼 반드시 갚는다는 책무의 인식이 작동한다. 받은 것을 책무로 인식하는 배경에는 결코 빌어먹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존의식,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자 하는 자립의식이 깔려 있다. 이 자존과 자립의 의식은 제주 사회에서는 일반적이어서, ‘성제가 열이라도 질루지만썩 살아야 ᄒᆞᆫ다(형제가 열이라도 자기만큼씩 살아야 한다)’라는 속담을 생성시킬 정도였다.

만약 자신이 노동력을 베푼 상대가 되갚지 않으리라는 의혹이 있거나, 베풂을 받은 쪽이 되갚음의 책무를 하지 않으려는 유혹이 있다면, 이 불신과 이기심은 곧 적대감을 낳으면서 친밀한 유대관계는 깨진다. 말하자면 공동노동·노동교환을 기반으로 형성된 마을공동체는 붕괴된다. 그런데 제주도는 한반도의 혈연공동체가 지니는 유대를 뛰어넘는 지연(地緣)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그 바탕에는 상호신뢰와 자신의 몫을 철저히 하는 염치, 자존의식과 자립의식이 있었고, 이에 의해 생활공동체 의식은 강화되어왔던 것이다.

해녀들의 물질 도구, 테왁

다음, 지연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어 온 배경에는 제주 사회가 동질사회, 수평사회라는 점, 그리고 그 사회문화에서 형성된 평등의식이 있다. 한반도의 서열적 인간관과는 달리 제주 전통사회는 수평적 인간관과 평등의식을 전승해왔다. 이런 차별성은 절해고도의 섬,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억압과 수탈의 역사적 조건이 관련되어 있다. 척박하고 협소한 농토와 피지배의 역사는 사회경제적 격차가 크지 않은 사회, 비슷한 처지의 동질사회를 형성하였고,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동류의식은 실질적이고 적시(適時)적인 생존전략으로서 수눌음 풍속을 강화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수눌음 문화는 마을살이의 자족성을 담보하는 것으로서 마을공동체의 결속력과 마을에 대한 귀속의식을 강화해 온 것이다. 

각자의 상황을 인정하는 공감과 배려, 염치와 신뢰에 기반한 호혜성은 수눌음의 정신성이었고, 척박한 땅 제주도에서 삶을 지키고 이어가기 위한 도덕성이었고, 억압의 삶에서도 공생을 지켜낸 실천이었다. 이에 수눌음 정신을 가히 제주 고유의 문화라 일컫는 것이니, 여기서 수눌음은 품앗이의 종(種)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개념으로 정립된다. 

# 변형되고 왜곡된 현대의 수눌음

모든 문화에 양면성이 있듯이 제주 공동체 문화의 표상으로 회자되는 수눌음은 그 자체에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궨당 혹은 마을로 표상되는 사적 관계망의 범위에 갇힌 행위였다. 즉 서로 수누는 관계란 온정적 공동체 내에서 교환을 전제로 한 결사체로서 관계이지, 자신의 이해(利害)를 넘어서는 헌신적 관계는 아니다.

그런데 경제 및 물질적 생활의 현격한 변화와 더불어 노동의 가치가 화폐로 책정되는 현재, 전통사회의 수눌음 조직은 상당 부분 와해되었고, 수눌음의 의미는 변형되고 왜곡된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이런저런 친목 모임과 ‘먹을 일’, ‘돌아볼 일’로 표현되는 부조 행위가 일상에서 얼마나 잦게 일어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단적으로 전통사회의 수눌음은 과도한 친목 모임과 환금성의 상호부조 문화에 집중되어 있다. 제주 사회 전체로 본다면 사적 관계망의 중층화 현상 및 각종 조직 활동이 사적 관계망을 동력으로 삼는 현상이 부정적 효과를 나타내는 실정이다. 

# 긍정적 의미 회복 통해 문화도시 지향점 삼아야

필자가 이 글의 표제에서 쓴 ‘다시 생각하자’는 세 가지 함축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전통사회에서 수눌음이 행해진 의미와 저변에 흐르는 정신적 가치를 되짚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문화적 지형이 변화된 현대에서 나타나는 변형되고 왜곡된 수눌음 양태를 성찰하자는 것, 마지막으로 현시점에서 수눌음 문화의 긍정적 의미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문화도시란 문화적 가치가 삶의 축을 이루는 사회, 달리 말하면 구성원이 문화적 가치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사회이다. 제주가 문화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제주 전통문화를 미화하고 고취하는 경직된 애향심에서 벗어나서 변화된 시대에 요구되는 가치의식과 조응하는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문화 저력이 필요하다.

제주시는 문화도시의 근간을 제주의 전통문화인 ‘수눌음’으로 삼고, 문화도시가 실현될 수 있는 동력을 수눌음 정신에서 얻고자 하고 있다. 바람직한 발상이다. 어떤 사회적 상황의 변화에도 유대와 공감, 배려와 신뢰, 협력과 공생은 사람살이에서 지켜내야 할 보편적인 문화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금의식, 타산성, 자기중심적 행위규범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대체적인 양상은 공동체적 감수성과 가치의식이 메말라 있다. 가히 문화적 빈혈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눌음을 제주 문화도시의 지향점으로 삼은 발상이 실현될 수 있으려면 우선적으로 두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하나는 수눌음 정신이 친밀한 동질사회를 넘어 이질사회로까지 확장, 포용할 수 있는 계기, 또 하나는 메마른 현실에서 현재적 삶의 폐해를 직시하고 문화도시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그것이다. 그래야만 사적 관계망을 뛰어넘는 공공심이 작동하는 문화도시가 가능해진다.


하순애

하순애(河順愛)는 동아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의대학교 겸임교수를 거쳐 제주대학교에서 인식론, 사회철학 등을 강의했으며, 일반 시민을 위한 철학교실, 시민문화강좌를 열어 왔다. 저서로는 『제주도 신당 이야기』,   공저로는『세상은 왜?—세상을 보는 10가지 철학적 주제』, 『제주도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