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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섬이다 ]

뱃삯
- 갈치, 옥돔, 재방어 낚기의 경우 -


조선왕조 영조 41년(1765)에 편집된 『증보 탐라지(增補耽羅誌)』(김영길 번역본, 제주문화원)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제주도의 화산섬 바닷속으로 그물을 드리우기가 사나우니, 물고기는 낚시로만 낚았다는 것이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는 일은 어부들의 일거리였다. 제주도 어부들은 낚싯배를 타고 일정한 어장으로 가서 갈치, 옥돔, 재방어도 낚시로 낚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낚싯배는 사람의 힘과 바람의 힘으로 이동하는 무동력선이었다. 낚싯배는 어느 한 어부가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낚싯배를 소유하지 않았던 어부는 이웃 어부의 낚싯배를 타고 어장으로 갔다. 제주도 어부들은 이웃집의 낚싯배를 타고 나갈 때마다 뱃삯을 물고기로 주었다. 이는 어부들의 관습법으로 작용하였다. 뱃삯의 정도는 물고기에 따라 달랐다.

원초 경제사회를 경험하였던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제주도 어부 사회에서 전승되었던 뱃삯의 속내를 들여다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원초 경제사회란 백성들이 삶에 필요한 자원을 자연에서 마련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시대이다.

1. 출어(出漁)(1960년대, 제주항), 촬영 홍정표

어부 세 사람이 낚싯배를 타고 갈치 어장으로 출어하고 있다.

2. 만선(滿船)(1960년대, 제주항), 촬영 홍정표

전날 밤 갈치 낚으러 나갔던 낚싯배가 만선이 되어 제주항으로 돌아왔다.


# 갈치 낚기와 뱃삯

갈치는 상강(10월 23일경)부터 곡우(4월 20일경)까지 깊은 바다에서 월동하였다. 그리고 곡우부터 처서(8월 23일경)까지는 갯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펄바다’에서 활동하였고, 처서부터 상강까지는 갯가에서 비교적 가까운 ‘걸바다’에서 활동하였다.

곡우부터 대서(7월 23일경)까지, 제주도 어부들은 ‘펄바다’에서 갈치를 낚았다. 이때 ‘펄바다’에서 낚는 갈치를 ‘봄갈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서부터 상강까지, 제주도 어부들은 ‘걸바다’에서 갈치를 낚았다. 이때 ‘걸바다’에서 낚는 갈치를 ‘ᄀᆞ실갈치’라고 하였다. ‘ᄀᆞ실갈치’는 가을 갈치라는 말이었다. ‘봄갈치’는 낮에 낚았고, ‘ᄀᆞ실갈치’는 밤에 낚았다.


제주시 평대리(구좌읍) 한윤혁(1920년생) 어르신에게 갈치 낚기와 뱃삯에 대하여 가르침 받았다. 1970년대까지 한 씨 어르신은 낚싯배를 타고 ‘ᄀᆞ실갈치’를 낚으러 다녔다. 이때 갈치 낚기는 간만(干滿)의 차가 보잘것없는 조금에만 이루어졌다. 자그마한 낚싯배는 간만의 차가 큰 사리 때에는 물살을 거스르기가 버거웠다. 그리고 갈치 낚기는 밤에만 이루어졌는데, 갈치는 야행성 물고기였기 때문이었다. 갈치 어구는 ‘갈치술’이라는 손줄낚시였다. 어부들은 각자 ‘갈치술’ 하나씩 갖추었다.

낚싯배는 어부 서너 사람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어부 네 사람이 타면 ‘갈치술’과 ‘갈치술’이 엉키기 일쑤였다. 제주도 어부들은 낚싯배가 비좁아 여러 개의 손줄낚시가 서로 뒤엉키는 모양을 ‘술맞춤’이라고 하였다. 한 씨 어르신이 타고 다녔던 낚싯배는 세 사람이 타야 ‘술맞춤’이 일지 않았다. 이때 어부 두 사람은 낚싯배 ‘한장’ 좌우에 각각 한 사람씩 앉아서 갈치를 낚았다. ‘한장’은 낚싯배 맨 한가운데 칸살이라는 제주도 말이다. 그리고 낚싯배 주인은 뒤쪽 칸살 ‘고물’에 앉았다.

갈치 미끼는 ‘고도리’라는 고등어 새끼거나 갈치 살코기를 발라낸 것이었다. 갈치 어장에 닻을 드리우고 낚싯배를 세웠다. 갈치가 물리는 수심이 달랐는데, 그 지점을 ‘ᄀᆞ리’라고 하였다. 어부들은 각자 자기가 고기 낚는 ‘ᄀᆞ리’를 찾아야 갈치를 많이 낚을 수 있었다. 낚싯배 선주는 두 사람의 어부에게 각각 어획량의 5분의 1의 갈치를 뱃삯으로 받았다.

# 옥돔 낚기와 뱃삯

옥돔은 제주도 지역에 따라 세가지 이름이 전승되었다. 제주도 동부 지역 사람들은 ‘오태미’, 남부지역 사람들은 ‘솔라니’, 그리고 제주도 서부 지역 사람들은 ‘생선’이라고 하였다. 옛 문헌은 옥돔을 ‘옥두어’(玉頭魚)라고 하는데, 이는 ‘오태미’를 한자어로 기록한 것이다. 옥돔은 ‘펄바다’에서만 사는 물고기이다. 어기(漁期)는 음력 9월부터 이듬해 음력 4월까지였다. 여름에는 맛도 떨어질뿐더러 쉬 부패하기 때문에 옥돔 잡는 일을 삼갔다.

제주시 월령리(한림읍) 사람들은 옥돔을 ‘생선’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 양창부(1926년생) 어르신에게 생선 낚기와 뱃삯에 대하여 가르침 받았다.
이 마을 사람들의 생선 어장은 차귀도에서 북쪽으로 서너 시간 노를 저어야 갈 수 있는 먼 곳에 있었다. 생선 낚기 물때는 두무날(음력 11일과 26일)부터 다섯무날(음력 14일과 29일)까지였다. 생선 낚기는 낮 동안에만 이루어졌다. 생선은 펄 속에 몸을 반쯤 묻고 있으면서 먹이 활동을 펼치는 물고기였다. 생선 어구는 ‘갈치술’과 같았다. 다만 낚시만 갈치 낚시보다 작았을 뿐이었다.

낚싯배는 어부 다섯 사람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낚싯배 앞쪽을 ‘이물자리’, 뒤쪽을 ‘고물자리’, 그리고 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장치인 ‘치’(키)를 꽂는 ‘칫궁기’(두리구멍) 주변을 ‘칫자리’라고 하였다. ‘이물자리’ 좌우에 어부 1명씩 2명, ‘고물자리’ 좌우에 어부 1명씩 2명, 그리고 ‘칫자리’에 선주 1명이 앉아서 생선을 낚았다. 생선은 닻을 드리우고 낚싯배를 세워 낚기보다는 조류와 바람을 따라 흘려 줘 가며 낚았다. 바람이 드세거나 조류가 세차게 흐를 때에는 닻으로 속도를 조절해 가며 낚았을 뿐이었다.

생선 낚싯배 선주는 네 사람의 어부에게 각각 어획량의 5분의 1의 생선으로 뱃삯을 받았다. 

# 재방어 낚기와 뱃삯

우도 사람들은 재방어를 ‘저립’이라고 하였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저립’은 이동성 물고기를 쫓아 우도 연안 가까이 몰려들었다. 제주시 오봉리(우도면) 주흥동 양순향(1935년생) 어르신에게 ‘저립’ 낚기와 뱃삯에 대하여 가르침 받았다.

우도 ‘저립’ 어장은 우도 북쪽 ‘박머리’에서부터 ‘새비ᄐᆞᆫ여’까지였다. 어기는 하지(6월 22일경)부터 상강(10월 23일경)까지였다. 하지 무렵에는 어린 ‘저립’이 우도 어장으로 몰려들었다. 우도 사람들은 어린 ‘저립’을 ‘깨저립’이라고 하였다. 음력 7∼8월 무렵에 ‘저립’은 150㎏ 정도까지 자랐다. 물때는 간만의 차가 느슨한 ‘조금’보다는 물살이 드센 사리 동안에 더 잘 잡혔다. ‘저립’은 주로 낮이나 달 밝은 밤에도 낚았다.

낚싯배는 세 사람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우도 오봉리 어부들은 세 사람이 같이 힘을 모아 ‘저립’을 낚았다. ‘저립’ 낚기 동아리들은 서로 힘을 모아 ‘저립’ 손줄낚시를 공동으로 마련하였다. 우도 ‘저립’ 낚시는 두툼한 줄 200여 발에 2m 철삿줄에 낚시를 달아맸다. ‘저립’ 낚시에서 25㎝ 위쪽에 자그마한 낚시를 다시 매달았다. 자그마한 낚시는 낚시에 꿴 미끼를 위에서 다시 꿰어놓는 것이었다. 

4. ‘저립’(재방어) 어장 ‘박머리’(2019년 10월 4일)

지금 ‘저립’ 어장 ‘박머리’에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저립’ 미끼는 갈치, ‘만배기’(만새기), 고등어였다. 이때 ‘저립’ 낚시 쇠뿔 양쪽에 구멍을 내었고, 그 자리에 소라 껍데기나 전복 껍데기를 박아놓았다. ‘저립’ 낚시의 쇠뿔은 아무것이나 되지 않았다. 3살쯤 된 살아 있는 황소 뿔을 뽑아 만들었다. 어린 수소 뿔이어야 빛깔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저립’의 눈을 끌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립’ 미끼에 따라 어법이 조금 달랐다. 갈치는 전통적인 미끼였다. 갈치를 반으로 토막을 내어 머리 쪽은 내던져 버리고 꼬리 쪽만 미끼로 삼았다. 이때 소뿔은 바로 갈치 머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갈치를 통째로 꿰면 ‘저립’이 꼬리만 잘라 먹고 내빼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만배기’는 1960년대부터 고안된 미끼였다. ‘만배기’를 낚싯배 안에 살려두었다가 산 채로 낚시에 꿰어 미끼로 삼았다. ‘만배기’가 없을 때는 고등어로 대신하였다. 미끼를 달아맨 ‘저립’ 낚시를 물속에 드리워 놓고 배를 이동시켜 가며 낚거나 닻을 드리운 채 배를 세워 놓고 낚았다. 앞의 어법을 ‘흘림배기’, 뒤의 어법을 ‘닷배기’라고 하였다. 미끼에 따라 어법이 달랐다. 

‘흘림배기’ 때는 갈치를 미끼로 삼았고, ‘닷배기’ 때는 살아 있는 ‘만배기’나 고등어를 미끼로 삼았다. 

또 어법이나 미끼에 따라 하루 중에도 시간대가 달랐다. 갈치 미끼를 이용한 ‘흘림배기’는 해 뜨기 전(이때를 '북새'라 함)이나 해가 질 무렵, 또는 달밤에 주로 낚았고, ‘닷배기’로 고등어를 미끼로 할 때는 밤에, 그리고 ‘만배기’를 미끼로 할 때는 낮 동안에 낚았다. ‘흘림배기’ 때 ‘저립’이 물면 ‘저립’과 배가 서로 줄다리기하듯 힘을 겨루었다. ‘닷배기’ 때는 배를 세운 채 미끼를 달아맨 낚싯줄을 흘려 주었다가 고기가 물면 힘을 내 낚싯줄을 잡아당겼다. 낚싯배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오봉리 어부들은 ‘저립’을 낚고 나서 서로 분배하였다. 어부 세 사람과 낚싯배 1척이 각각 4분의 1씩 나누어 차지하였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람의 힘과 바람의 힘으로 낚싯배를 부렸던 원초 경제사회 때의 제주도 어부들은 바다밭 조건에 따라 배의 크기를 달리하였다. 갯가와 비교적 가까운 ‘걸바다’를 오갔던 낚싯배는 어부 세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였고, 갯가와 비교적 멀리 떨어진 ‘펄바다’를 오갔던 낚싯배는 어부 다섯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였다. 갈치와 옥돔 낚기의 경우, 뱃삯은 어부마다 어획량의 5분의 1을 선주에게 주었고, 재방어 낚기의 경우, 어획량을 4등분으로 나누고 어부와 낚싯배가 각각 1등분씩 차지하였다.

제주도 낚싯배에 엔진이 장착되고 대형화되면서부터 제주도 낚시어업은 크게 달라졌다. 원초 경제사회 때에는 조금 때만 갈치와 옥돔을 낚으러 갔었지만, 지금은 물때를 가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원초 경제사회 시대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고기를 낚았다면, 개발 경제사회 시대 사람들은 자연에 거스르며 고기를 낚고 있다. 그 결과, 제주도의 갈치와 옥돔은 자원 고갈로 치닫고 있고, 재방어는 완전하게 고갈되고 말았다.


고광민  |  서민생활사 연구자

『제주생활사』, 『동의생활사』, 『제주도 도구의 생활사』등의 서민생활사 연구결과를 이어가고 있다.